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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스포일러 있음.



백야행(白夜行)

히가시노 게이고 (지은이)
정태원 (옮긴이) / 태동출판사


추리물을 굳이 찾아서까지 볼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에, 일본 소설이나 에세이 등은 여러 권 읽어왔어도 추리소설에 손을 뻗어본 적은 없다.

드라마 <백야행(白夜行, 2006년)>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들어왔으나 긴장감이 느껴지는 재미가 있다 하더라도 어쩐지 음울한 분위기의 이야기에는 손이 잘 가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보겠다던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랬던 내가 소설 '백야행'을 찾아서 읽은 이유는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유성의 인연(流星の絆, 2008년 4분기)> 때문이었다.

그 때쯤 막 일본어 수업을 등록했고, 어쩐지 내키지도 않고 잘 봐지지도 않았지만 일본어 공부를 위해서라도 일본 드라마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러던 중 <유성의 인연>이 쿠도 칸구로의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어쨌거나 보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실 쿠도 칸구로의 드라마라는 것을 미리 알고 보지 않았다면, 그의 드라마라는 것을 눈치채기 어려운 어두운 분위기여서 '이제 색다른 걸 시도하려고 하는 건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극중극'의 형태를 취한다거나, 쿠도칸 사단이라고 불리우는 배우가 간간히 눈에 띄는 점이나, 여전히 쟈니즈를 주인공으로 쓰는 점(...) 등 쿠도칸 색깔을 찾아볼 수 있잖아? 라고 스스로 납득시키고 있다가, (두등!) 원작소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역시...

기존의 쿠도칸 드라마와는 뭔가가 다르더라니.

원작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쩐지 원작을 보고 싶어진다. 아무리 잘 만든 영화나 드라마라도, 독자의 상상력이 더해진 원작 소설의 맛을 이기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쿠도칸의 드라마라도 어쩐지 일본어로 떠드는 것에 대해 집중하기 어려웠던 시기라서 찔끔찔끔 간신히 드라마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결국은 드라마가 종결된 즈음에서야(최근이다) 비로소 <유성의 인연>에도 재미를 붙여 후다닥 해치워버렸다. 어라? 분명 드라마 시작 즈음에는 국내에는 원작소설이 출간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요즘 다시 찾아보니 신간으로 나와있다. 어느 출판사인지 칭찬해주고 싶군. 타이밍이 좋아. 후후.

암튼 국내에는 원작소설이 출간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던터라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이라도 읽어봐야지 했다. 아, 이 작가가 그 유명한 '백야행'의 작가이기도 하구나.

드라마를 볼까? 소설을 볼까? 하다가 소설을 보기로 했다.
음울한 분위기의 드라마를 11편이나 볼 자신이 없었고, 일본 드라마 특유의 질질 끄는 느낌으로 전개될까봐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본격적으로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의 리뷰라든가 간단한 정보 등을 찾아봤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이 사소한(...) 행위가 소설을 읽는 내내, 그리고 읽은 후의 감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이런 개인적인 요인을 고려하여 별점을 매긴다면 ★★☆ 정도 줄 거 같다. '기대보다 약했기'때문.

무엇보다 하지 말았어야 했던 건, 드라마 1화를 아주 간략하게나마 훑어봤던 거다. -_-
내용에 대한 힌트를 얻을 정도로 본 것도 아니고, 드라마를 볼까 고민하던 차에.. 분위기가 얼마나 음울한지 맛보기(?)로 스킵- 스킵해가며 몇 장면 본 것 뿐이었는데..

바로 그 몇 장면 중에.. 여주인공이 죽어가는 남주인공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뒤돌아 가버리는 장면이 있었다. (제길;)

바로 이 장면.. 드라마 백야행의 도입부다. 1화 첫 장면.



그리고, 드라마가 범인을 다 밝히고 시작한다고 해서 범인이 누구인지, 왜 살인을 저지르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드라마 소개글.

소년 료지는 첫사랑인 소녀 유키호를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에게 매춘을 강요 당한 유키호도 료지를 감싸다가 어머니를 살해한다. 료지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짊어진 유키호의 인생에 빛이 되기 위해 어둠의 세계에서 살기로 결심, 많은 범죄로 손을 더럽혀 가고 유키호 역시 거짓된 인생을 살아간다.

지금 드라마를 캡쳐하느라 앞부분 다시 봤더니 (최초에는 스킵해서 보느라 도입부 중 딱 저 장면만 봤었다) 주인공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도 있고 그만큼 드라마에서는 두 사람의 사랑을 큰 주제로 다룬 것 같은데...

소설은 '드라마 소개글'에 드러난 내용이 전부. 더헉- 
+a 라면, '거짓된 인생'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는 걸까나.

소설은 후반부로 가면서 범인의 윤곽이 점점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고, 결말에 이르러서 이 모든 과거를 지켜본 독자로 하여금 '사랑인가?'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지만.. 두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 사랑을 나누는 건 둘째치고, 두 사람이 만나는지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그야말로 모든 것은 독자의 상상력에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감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독자는 소설 '백야행'을 읽고 난 후 "추리소설을 읽고 가슴이 먹먹하다니. 별 일도 다 있다."고 말했다.

위 리뷰를 남긴 사람은 드라마는 본 적이 없는 듯 하다.
드라마에 노출되지 않은 독자의 순수한 리뷰가 부러워지다니.

난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본 탓에, 게다가 범행동기가 사랑이라고 알고 본 탓에 소설 마지막 권을 덮으면서는 어쩐지 손해본 듯 한 기분이었다.

불필요한 기대를 안고 보느라 나름 재미있는 소설인데도 그리 깊은 인상을 받지도 않았다.

소설은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그 중심에 있는 두 인물의 이후 19년의 삶을 보여준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결혼, 사회생활 등. 그 삶 속에 또 다른 사건이 있고, 얽히는 인물들이 있고. 두 사람 모두 어딘가 수상쩍은 점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변 사람들에게 남기면서.. 삶의 에피소드가 쭈욱 나열되는 느낌으로 하나씩 하나씩 보여준다.

그러나 범인과 범행동기를 알고 있는 나는, 어떤 일이 계속 벌어질까에 대한 궁금증은 크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 이 모든 수상쩍은 사건이 밝혀지게 되는 걸까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 덕분에 소설 후반부에 하나 둘 그간 나열되었던 에피소드가 연결되어 가는데도 '이런!'하고 놀라거나 감탄할 수가 없었다. 왜? 난 이미 짐작하면서 읽었거든. 뭐, 범인 모르고 봤었도 '짐작'하는 게 어려운 전개는 아니었다만.

뭐랄까, 반전 영화에 반전이 있는 걸 알고 보면 재미가 반감되는 거랑 비슷할 거 같다. 스릴러나 범죄 영화를 보면 유력하게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지만, 결국은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밝혀질 때가 있다(많다). 헌데 '반전이 있음'을 알고 보면 의외로 쉽게 범인을 짐작해낼 수도 있다. 유력한 용의자를 일단 제외하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불필요한 인물이 의미 있게 등장하지 않을테니)에 주목해보면 된다.

소설 속 에피소드를 볼 때가 그랬다.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합쳐질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것. 애초에 관계 있는 에피소드만 주욱 나열하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읽는 내내 정말 궁금했던 것이 모든 것이 드러난 이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는 거였는데, 소설은 정말 많은 부분을 독자가 스스로 생각해보도록 남겨두고 끝나 버린다.

소설의 이런 불친절함(?)에 대해, 어느 독자는 "이미 심정적으로나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범인은 일찌감치 눈치챈 상황에서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유'와 '관계'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끈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정말 단숨에 읽어내려갔지만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명쾌하지 않다. 이야기의 전말도 알았고 그들의 관계도 알았지만 끝내 료지와 유키호의 숨겨진 내면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위 링크의 리뷰 추천한다.+_+)

내가 드라마 관련 정보, 리뷰를 미리 읽어본 것이나 드라마 1화의 한 장면을 본 것이 책의 감상을 방해한다고 느낀 게 이런 점 때문이다. 내 스스로 생각해볼 여지를 많이 빼았긴 채, '사랑'이 정답이라는 조언을 받은 기분이라고 할까? 여주인공의 저 애틋한 눈빛.. 어찌할거냐고.

게다가 그들이 정말 '사랑'때문에 그렇게 살았는지에 대해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를 떠올리게 된다.

소설에서 두 사람을 좇는 노년의 형사는 두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포새우는 구멍을 파 그 안에서 생활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구멍에서 식객노릇을 하는 놈이 있어요. 문절망둥이라는 생선이죠. 그 대신에 문절망둥이는 입구에서 망을 보고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꼬리지느러미를 흔들어 안에 있는 대포새우에게 알린다고 합니다. 정말 멋진 콤비네이션이죠. 그걸 공생이라고 한다던가." (백야행 下)

우리가 쉽게 '사랑'이라고 결론지어버리는 건 불합리한 일, 손해보는 일, 창피한 일 등 보통은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일까...?

그래서 작가가 독자에게 남겨둔 여러가지 궁금증, 애매함, 답답함 등을 한 방에 해소하는 처방약으로 '사랑'만한 게 없는 걸까.

"요즈음 일본에서 백야행이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되고 있다. 1회를 봤는데 책에는 나와 있지 않은 그들의 어린 시절과 친해진 배경 등이 자세히 묘사되어 사건의 동기부여 면에서는 책보다는 친절하고 자세하다. 하지만 드라마의 한 방향으로 정해진 결론이 이 책을 읽고 무한히 펼치던 상상력에 장애로 작용할 것 같아서 조금은 염려된다."

어느 리뷰 속 코멘트(위)에 크게 공감하는 바이다. 내가 바로 그 장애를 겪고 있는 터라...

게다가 사전 정보를 취한 탓에, 후반부에서 이 모든 미심쩍은 일들을 작가가 명쾌하게 풀어줄거라는 '불필요한 기대'까지 품고 말았던 것도 장애다.

얼마 전 읽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영화화하면서도 로맨스를 잔뜩 가져다 붙이더니...
드라마 <백야행>도 (범인을 공개하고 시작하는 점도 그렇고) 로맨스가 아닐까 생각된다.

책을 덮고 나서부터 계속 머릿속이 엉망진창인데, 나중에 드라마의 상상력은 어떤지 한 번 찾아봐야 겠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엄지 손꾸락 두 개 퐉퐉 날려주는 녀석이니 내 헝클어진 상상력보다는 멋진 얘기를 들려주지 않으려나.


- 뱀발 -
난 꼭 두 사람이 사랑하기 때문에 공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손을 더럽히더라도 지켜주고 싶은, 그런 절절한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느샌가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걸 수도 있지 않나?

드라마에서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던 여주인공과 다른 담담한 태도의 소설 속 여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에 자꾸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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